[현프철] 1. 타자 이론 개괄 및 역사

210303 | 타자 이론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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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괄

타자와의 조우, 타자와의 만남이란 결코 외면할 수 없다. (현대의 예를 들자면 이민자 등의 방식이 있다.) 역사적으로 비극적인 국면들은 타자에 대한 탄압으로부터 발생했다.

철학자들은 국경을 기준으로 사유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서, 실존주의같은 사조가 이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의 철학적 원천은 후설, 하이데거, 헤겔(독일의 철학자)와 같은 현대 독일 철학에 있다.

따라서 현대 프랑스의 사상이란 현대 유럽이라는 보다 넓은 범위 안에서 탐구되어야 하고, 국적 안에서 제한될 수는 없다.

타자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란, 후설의 작품 데카르트적 성찰" 로부터 시작된다. 이 수업에서는 후설 및 레비나스, 데리다, 들뢰즈 등 철학자의 타자 이론도 살펴보고, 이 사상들이 어떻게 고립되어 있지 않고 서로 논박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를 알아본다.


타자(l'autre / the other)

타인(l'autrui / the Other)

이타성(altérité, alterity, 異他性)


그리스와 유대인의 사유

그리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 : 모든 나그네와 거지는 제우스에게서 온다니까요. 축복 받은 손님께서는 신님의 가혹한 행위를 좋아하시지 않고 ...

오디세이아

유대인


서구 사유의 전체주의적 면모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유는 타자의 타자성을 억압하는 면모, 즉 전체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에로스의 기원 - "향연", 플라톤

플라톤의 향연에서도 전체주의적 성향을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의 변증법

p ^ ~p

오늘날의 타자에 대한 접근 방식에도 전체에 대한 향수의 흔적이 남아 있다.

헤겔에서 p의 와 p의 타자인 ~p는 부정성(negativity, nagation)의 관계, 대립 관계에 놓인다.

결론

이런 까닭으로 타자 이론은 타자를 사고하는 것 같지만, 전체를 사고하는 것이다.


근대 학문에서의 타자

타자를 타자성보다는 전체성, 동일성의 영역 안에서 타자를 사유하는 것은 근대에 와서는 더욱 근본적인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근대 세계 안에서 타자는 어떻게 동일자로 흡수되는가?

근대 학문의 본성

미리 알려진 것을 선행적으로 진입시켜서 연구 영역을 열어 놓고, 그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것.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서 질서와 규칙성을 우리는 스스로 집어넣는다.\

  •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인종적 편견

근대적인 탐구, 정신은 결코 중립적인 과학, 수학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인종적 열등성에 대한 편견에 이끌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아프리카의 니그로는 본래 유치함을 넘어설 만한 감정이라고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어떤 니그로가 재능을 보여주었다는 한 가지 예를 인용한 모든 이들에게 흄은 이의를 제기하며 이렇게 주장한다. 자신의 조국에서 다른 나라로 끌려온 수십만 명의 흑인들 중에서, 물론 많은 수가 자유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에서나 학문에서, 아니면 다른 훌륭한 특성에서 어떤 위대함을 보여주었던 사람은 아직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백인들 중 몇몇은 밑바닥 삶에서 끈질기게 일어서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세상의 존경을 얻는다. 이처럼 두 인종간의 차이는 본질적이며, 그것은 피부색에서와 마찬가지로 심성의 역량에서도 크게 나타난다. 그들에게 만연된 물신숭배의 종교는 인간 본성에서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기괴함으로 깊이 빠져들고 마는 어쩌면 일종의 우상숭배일 것이다. 깃털이나 소뿔, 조개, 혹은 몇 마디 말로도 신성해지는 여러 가지 흔한 일들이 신성에 대한 맹세에서 숭배와 기원의 대상이 된다. 흑인들은 너무도 허황되지만 니그로의 방식에서 그렇다. 그래서 그들은 요상한 말로 지껄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분명 매질만이 그들을 서로 흩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아름다움과 숭고한 감정에 관한 고찰

캉디드는 어느 날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오른팔과 왼팔이 잘린 채 누워서 네덜란드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아프리카 흑인을 본다. 이 흑인을 보고서 왜 네덜란드 주인이 그렇게 만들었는지 캉디드가 묻는다. "네 나으리. 그게 관습입죠. 의복이라고는 1년에 두 번 무명 속바지 하나씩을 주는 게 고작입죠. 설탕 공장에서 일하다가 잘못해 맷돌에 손가락이 딸려 들어가면 손을 자르고, 도망을 치다 잡히면 다리를 자르지요. 저는 그 두 가지를 다 겪었습죠. 당신네 유럽인들이 설탕을 먹는 것은 그 덕입죠. 예전에 울이 어머니가 기니의 해안에서 돈 열 냥을 받고 저를 팔았을 때, 어머니는 기뻐하며 말하셨죠. 사랑하는 아들아. 신령님께 감사드려라. 항상 그들을 경배하여라. 그들이 너를 행복하게 지켜주실 거야. 영광스럽게도, 너는 백인님의 노예가 되었고, 그 덕에 네 어머니, 아버지는 운이 피게 되었어. 맙소사!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진짜로 운이 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제 운은 전혀 아니었습죠. 개나 원숭이나 닭도 우리 처지보다는 훨씬 나아요. 저를 개종시킨 네덜란드 무당들은(네덜란드 목사들을 가리킴) 일요일마다 흑인이나 백인이나 다같이 모두 아담의 자식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족보같은 건 모르지만, 그 무당들 말이 맞다면 우리는 모두 친척입죠. 그런데 어떻게 친척에게 이렇게 지독하게 굴 수 있을까요?

볼테르,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